
기획은 디자인의 선행 조건이다
많은 이들이 기획과 디자인을 수평적인 관계로 보거나, 디자인을 단순히 '예쁘게 포장하는 단계'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기획은 디자인의 선행 조건입니다. 기획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며, 디자인은 그 답을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과정입니다. 기획은 단순히 일정을 짜는 것이 아닙니다. 인문학적 통찰과 비즈니스 리더십, 그리고 실패를 견디는 지구력이 필요한 '뿌리 내리기' 과정입니다. 뿌리가 깊고 견고할수록, 그 위에 피어나는 디자인이라는 꽃은 더 깊은 미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멋있게"라는 말에 멈춰서는 용기
클라이언트가 "그냥 멋있게, 있어 보이게 만들어 주세요" 라고 말할 때, 저는 디자인 툴을 켜는 대신 "멋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브랜드가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나요?"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겉모습만 화려한 브랜드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 공허함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클라이언트와 함께 본질을 찾아가는 대화를 시작합니다. "이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객이 겪는 진짜 문제는 무엇이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요?" 이런 질문들은 때로 답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으면, 아무리 세련된 디자인도 깊이 없는 겉치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본질을 찾는 과정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 끝에서 발견한 정체성은 단순히 '멋있는' 디자인이 아닌, '신뢰받는' 브랜드를 만듭니다.
피카소의 낙서와 유아의 낙서는 다르다
기획이 입체적인 뼈대를 세우는 일이라면, 디자인은 그 위에서 '무엇을 덜어낼지' 결정하는 일입니다. 많은 주니어 기획자와 디자이너들이 '미니멀리즘'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비움인지, 아니면 충분히 채워보지 못한 상태에서의 선택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카소가 말년에 단순한 선 몇 개로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사실적인 회화의 정점을 찍어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채워본 사람만이 무엇을 비워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프로젝트 초반 단계에서 경쟁사 비주얼 분석과 타깃 고객 리서치를 통해 시장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채움'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이 브랜드에게 필요 없는 것'이 보입니다. 그때 저는 과감하게 덜어냅니다. 방대한 리서치와 트렌드 분석을 통해 기획을 '가득 채우고', 디자인 단계에서는 고객의 니즈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감하게 '덜어냅니다'. 이것이 제가 추구하는 '덜어냄의 미학'이자, 최고 단계의 유연함입니다.
유행이 아닌 색깔을 남기는 것
트렌드는 급변합니다. 어제의 '멋짐'이 내일의 '촌스러움'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유행을 쫓는 브랜드가 아니라, 중심이 있는 브랜드를 만듭니다. 고객의 니즈에는 부합하되,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색깔'. 이것은 오직 견고한 기획(뿌리)과 본질만 남긴 디자인(가지치기)이 만났을 때만 가능합니다. 저는 이것이 지속 가능한 브랜드의 유일한 생존 방식이라 믿습니다. 5년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브랜드 디자이너의 책임입니다.
채우고 비우는 디자이너
저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넘어, 브랜드의 본질을 발견하고 그것을 오래도록 지속 가능한 형태로 구현하는 일을 합니다. 본질을 파고들어 채우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어 비로소 '오래가는 것'을 만드는 과정.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브랜드 전략의 핵심입니다.

